문화유산 탐방/박물관 속 문화유산

[박물관 속 문화유산] 극적인 발견으로 복원된 청동기 농경 문화

데구르 도이 2023. 11. 27. 20:04

박물관 속 문화유산, 농경문 청동기

 

 


박물관 속 문화유산 # 4

한국사를 배우는 과정에서 신석기 농경의 시작, 청동기 벼농사의 시작으로 공식처럼 외우지만 선사시대에는 문자가 없어 실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던 시기입니다. 여러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청동기 농경문화를 추론할 수 있지만 오랜 세월의 흔적이 지나가면서 구체적인 내용들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당시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은 시각자료 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오늘 소개 드릴 농경문 청동기는 그런 면에서 청동기 시대 유물 중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 농경문 청동기는 어디서 찾았을까?

 

농경문 청동기는 우연히 발견되어 극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1970년 말 대전의 한 상인이 고철 수집을 하던 사람으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물의 중요성을 알아보아 구입하여 수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농경문 청동기는 정확한 출토상황이나 출토지조차 불문명하고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만 전해집니다.


2. 농경문 청동기는 왜 만들어진 걸까?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농경문 청동기는 아산 남성리, 대전 괴정동 출토 방패형 청동기와 유사한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만 하반부는 사라져있습니다. 폭은 12.8cm정도로 이 두 출토지에서 나온 청동기들과 크기가 유사합니다.

 

농경문 청동기는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중서부 지역에서 발견되는 방패형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는 출토품들을 보면 농경문 청동기가 제작된 목적에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중국의 예를 보면 방패형 청동기는 청동도끼를 담는 주머니 장식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앞 뒤 문양이 시문되고 청동 도끼와 출토가 되지 않는 사례가 함께 나왔기 때문에 중국과 동일한 용도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방패형 청동기는 검파형동기, 견갑형 동기와 함께 발견되며 이 두개의 청동기 역시 신체의 일부분만 묘사를 해놓거나 기하학적 문양으로 청동기가 장식되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무력행사에 사용하기 어려웠던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는 것을 보면 이 방패형 청동기도 무력행사를 위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제의를 위하여 만들어진 청동기라는 것인데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요?

 


3. 표현된 그림과 실제 청동기 농경 문화와의 관계는?

 

이름과 같이 농경문 청동기는 농경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청동기에는 모두 음각으로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한쪽 면에는 따비로 밭을 가는 사람, 괭이를 치켜 올린 사람, 항아리와 함께 그려진 사람 3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앞면의 밭을 가는 사람은 남근이 표현되어 있으며 깃털에 같은 것을 꽂고 있어 생산과 풍요, 자손의 번영 등을 의미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왜 옷을 벗고 있는 걸까요?

 

그에 대한 힌트는 조선시대 문인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희춘의 문집인 『미암선생집』에는 매년 봄에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농사를 짓는 형상을 만들어 풍작을 비는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밭을 갈 때에는 추워도 반드시 나체여야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자세하게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추위를 견디는 씩씩함을 보여주고, 그 해 따뜻한 상서로움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천지의 조화를 아이들의 장난으로 빼앗을 수 있겠는가. 사막의 얼고 추운 곳에서 손발을 한번 드러내면 금방 손발이 얼어 터지는데, 더구나 옷을 다 벗고 알몸으로 길거리에 서 있음에 오죽하겠는가. 바람과 서리가 뼈를 쑤시고 몸이 벌벌 떨려서 기침과 고질적인 냉병을 백에 하나도 면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과 다르겠는가. 인자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이것을 본다면, 어찌 섬뜩하게 두려워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관원에게 물으면, “백성들의 풍속이다.”라고 하고, 백성에게 물으면, “관원이 시켜서 한다.”라고 한다. 대개 이것은 처음부터 사리를 깨닫지 못한 데에서 생기어 마침내 편안히 여겨 이루진 풍속이 되었다.
유희춘, 『미암선생집』, 권3, 잡저

 

추위를 견디는 것을 보여 풍작을 비는 의지를 보여주는 의미라 하지만 실질적으로 미신에 기반한 악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세기 나경은 함경도 이외의 지역에서 많이 사라져 있는 악습 중 하나로 여겨지는데, 이를 타개할 지방관이 없음을 한탄해합니다.

 

비록 시대의 차이가 많이 나지만 나경이라는 행위는 봄에 밭을 가는 형태와 남근에서 착안한 고대의 제의 형태였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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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문 청동기, 길이 12.8cm, 국립중앙박물관, 신수 1794(사진 출처 : 이뮤지엄)

 

 

 

한편 반대쪽에는 솟대와 함께 4마리의 새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농경문 청동기, 길이 12.8cm, 국립중앙박물관, 신수 1794(사진 출처 : 이뮤지엄)

 

왼쪽에 Y자 형태로 나뉘어지는 나뭇가지 형태에 2마리의 새가 마주보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솟대와 장승 사진, 한국-대한제국, 13.5x10cm, 국립민속박물관, 민속 86192(사진 출처 : 이뮤지엄)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과거 마을에 설치되어 있던 솟대가 단번에 떠오르는 그림입니다. 솟대는 무엇일까요?

 

솟대는 크게 장대와 새로 나누어지는데 장대와 새 모두 이승, 저승, 인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솟대의 기원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한국에서 발견된 예로는 농경문청동기의 그림을 시작으로 오랜 역사 속에 이어져 온 문화 중 하입니다. 벌거벗은 모습으로 풍요를 간절히 기원하는 모습과 신에게 풍작을 기원하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로 솟대를 농경문청동기에 새겨 넣으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의미를 기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사이트

국립중앙박물관

한국고전종합DB

이뮤지엄

 

참고 논문

한병삼, 선사시대 농경문청동기에 대하여, 미술사학연구 112, 한국미술학회, 1971.

권오영, 고대의 나경, 고고학 7-2, 중부고고학회, 2008.

김효정, 세형동검문화 청동의기의 의미 복원 연구, 고고광장 28, 부산고고학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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