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탐방/박물관 속 문화유산

[박물관 속 문화유산] 오리의 뒤뚱뒤뚱 영혼 인도

데구르 도이 2024. 9. 17. 04:27

[빅물관 속 문화유산] 오리모양토기

 

 

박물관에 방문하면 한 번쯤은 꼭 봤을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귀엽게 생긴 바로 새모양 토기입니다. 이런 토기들을 상형토기라고 부르는데, 상형토기란 특정 어떤 모양을 본떠 만든 토기로 동물, 사람, 물건 등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이 새모양 토기는 크기도 제각각에 생김새도 조금씩 달라, 볼 수록 눈이 가는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입니다.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새모양 토기는 현재 우리는 오리모양토기로 통칭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이 오리를 닮은 이 새모양 토기는 대체 왜 만들었던 것일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 본글에서 편의상 오리모양토기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

(좌) 오리모양 토기, 높이 18.2cm, 국립경주박물관, 접수 566 / (우) 오리 모양 토기, 높이 35.2cm, 국립중앙박물관, 건희 5345(사진출처 : 이뮤지엄)

 

1. 오리모양토기의 사용처와 의미

 

오리모양토기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생김새를 먼저 살펴보면 오리모양토기의 내부는 텅텅 비어있습니다. 토기의 풍만한(귀여운 뱃살) 배와 곡선은 내부가 용량이 조금 더 확보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또, 외부에 물이 나올 수 있는 출수구가 뚫려 있거나 등에 커다란 구멍을 두어 액체류를 덜거나 따라서 쓸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 김영희, 호남지방 조형토기의 성격, 호남고고학보44, 호남고고학회 2013, 그림 3

 

처음 오리모양토기는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는 장송의례에 사용되었거나 의례, 제사에 사용된 유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연구가 진행되고 최근에 출토사례가 많아지면서 4세기 변화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리모양토기에 목이 없고 몸통만 있는 유형, 다리가 없는 유형, 실존 오리와 다르게 4족으로 표현된 유형 등 변화가 나타났고, 무덤 이외 지역에서 출토사례가 확인되었습니다. 4세기에는 단순히 장송의례와 관련된 내용이 아닌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때문에 최근 연구에서는 삼국시대 다양한 새의 의미가 반영되어 오리모양토기가 제작되었음을 고려해야한다는 주장도 등장하였습니다. 

 

2. 오리모양토기의 의미를 찾아서

오리모양토기는 옛날부터 특수한 용도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러 모양의 상형토기 중에서 오리모양토기는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대부터 많이 제작되었던 것은 고대인들에게 새는 특별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가장 쉬운 힌트를 제공해주는 유물이 전해집니다.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던 농경문 청동기 입니다.

 

농경문 청동기를 살펴보면 앞면에는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의 모습, 뒷면에는 새들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습니다. 새들을 왜 농사와 관련된 주제와 함께 배치하게 된 것일까요?  그 배경에 대해서는『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에 기록을 참고하기도 합니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蘇塗)’라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신을 섬긴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 木校勘, 毛本, 木, 作本, 誤縣鈴鼓, 事鬼神.

 

씨를 뿌리며 제천행사를 지내는 신을 모시는 이 기록에서처럼 농사와 소도, 그리고 솟대의 관계를 참고하여, 농경문 청동기의 이 그림이 농경의례를 행하는 신성한 영역인 소도 안에 세워졌던 솟대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농경에 대한 기복과 하늘을 이어주는 특정한 상징물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농경문청동기, 길이 13.5cm, 국립중앙박물관, 신수 1793(사진출처 : 이뮤지엄)

 

『삼국지위서동이전』 변진조(弁辰條)를 살펴보면

장례에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는데, 이는 죽은 자가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

 

라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창원 다호리 유적 무덤 안에서는 새의 깃털을 꽂을 수 있도록 만든 칠기부채,  경주 탑동 및 여러 유적에서도 같은 형태의 부채가 출토되었습니다. 부채가 출토된 지역에서는 오리모양토기와 새를 형상화한 토기들이 무덤에서 출토한 예도 있습니다. 이것은 새는 죽은 자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했고, 새의 깃털과 오리모양토기를 만들어 무덤 안에 고히 넣어두어  죽은 사람의 험난한 길을 편안히 갈 수 있도록 했던 고대인들의 마음이 돋보이기도 합니다.

(좌) 칠기 부채 자루, 높이, 34.1cm, 삼국시대, 국립김해박물관, 김해68922 / (우) 유물 이해를 돕기 위한 AI 활용 합성 그림

 

소도와 장사를 지내는 기록에서 새의 역할은 하늘과 사람을 이어주는 특별한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무덤에서 출토되는 오리모양토기의 의미를 추정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출토되는 오리모양토기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3. 한국 역사에서의 새를 바라보는 생각들

개인적으로 새가 동물을 귀여워 하는 편이라 이 문화유산을 볼 때마다 그냥 귀여워서 만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본 적이 많습니다만.. 문화유산으로 오리모양토기 의미를 더 살펴보기는 어려움이 많아 기록을 통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문헌 기록을 통해 새에 관한 생각을 조심스레 나열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신성한 새로서의 의미

  • 신화 속에서 신과 이어주는 매개자
  • 하늘로의 인도자
  • 곡령(穀靈) / 곡물의 싹과 열매를 맺게 해준다는 영혼

2. 장송의례와 관련한 의미

3. 단순한 동물로서의 새 

 

위와 같이 새는 한국사에서 상당히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귀여운 오리잖아 그냥!!) 

이렇듯 문화유산으로 남겨져 있는 새들은 단순히 동물로 여겨지는 것보다 새 자체를 신성한 동물(靈物)로 여기고 왕과 관련한 정치적 행위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히 많은데, 꿩, 오리, 두루미, 느시, 고니(白鵠) 등 다양한 새종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렇다는 건 신성한 새가 제사 혹은 죽음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4. 역사 속에 등장하는 새의 모습들

새들이 등장하는 모습 몇 가지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동국이상국집에 전하는 새들의 모습입니다. 이 자료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의 신성성을 가장 잘 간직한 자료로 여기서 등장하는 새들은 정치적 지배자를 도와주는 조력자 혹은 신성성을 더해주는 요소로 활용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卷3, 古律詩 東明王篇 所引 舊三國史

천제(天帝)가 태자(太子)를 보내 부여왕의 옛 도읍에 내려와 놀았는데, 이름이 해모수(解慕漱)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오룡거(五龍車)를 탔고, 따르는 사람 1백여 인은 모두 흰 고니(白鵠)를 탔다.

 

하백(河伯)이, “왕이 천제(天帝)의 아들이라면 무슨 신통하고 이상한 재주가 있는가?” 하니, 왕이, “무엇이든지 시험하여 보소서.” 하였다. 이에 하백이 뜰 앞의 물에서 잉어로 화하여 물결을 따라 노니니 왕이 수달로 화하여 잡았고, 하백이 또 사슴으로 화하여 달아나니 왕이 승냥이로 화하여 쫓았고, 하백이 꿩으로 화하니 왕이 매로 화하였다.

 

서쪽을 순행하다가 사슴 한 마리를 얻었는데 해원(蟹原)에 거꾸로 달아매고 저주하기를, “하늘이 만일 비를 내려 비류왕(沸流王)의 도읍을 표몰시키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 이 곤란을 면하려거든 네가 하늘에 호소하라.” 하였다. 그 사슴이 슬피 울어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니 장마비가 이레를 퍼부어 송양(松讓)의 도읍을 표몰시켰다, 송양왕(松讓王)이 갈대 밧줄로 흐르는 물을 횡단하여 오리와 말(鴨馬)을 탔고 백성들도 모두 그 밧줄을 잡았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긋자 물이 곧 줄어들었다.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한다

 

이 밖에도 박혁거세, 주몽, 김수로 등이 알에서 태어나는 설화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고대 국가에서 새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농사와 하늘을 이어주는 중요한 동물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한국사에서 비슷한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특정 동물을 제외하고, 새의 신성함보다 먹거리, 평범한 동물, 교역품으로서 인식하고 있는 기록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의 식사는 하루에 飯米 3斗, 수꿩 9마리였다. 庚申年(660)에 백제를 멸망시킨 후부터는 점심 식사를 제외하고 단지 아침, 저녁만 하였다. 그러나 합하면 하루에 米 6斗, 술 6斗, 꿩 10마리였다
三國遺事 卷1, 紀異1, 太宗春秋公

 

평남 대동군 팔청리 벽화분 고기간 모사도(꿩 등 조류) 출처 : 이장웅, 한국 고대 새(鳥類) 관념의 변화, 한국고대사탐구 31,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 p. 363.

 

주목되는 것은 5세기 신라에서의 변화입니다. 매장품들은 점차 오리모양토기보다 배모양・집모양・곳간모양・신발모양 등의 상형토기가 많아지고 오리모양토기는 점차 신라 외곽지역으로 확대되고, 그리고 가야지역에서 새표현이 많아지는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새를 중심으로 하였던 장례, 조령신앙 등이 유교와 불교 등으로 대체되어 나가고, 새는 동물 혹은 교역품 성격이 더 강화되어 가면서 생긴 변화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의 변화에 따라 귀여운 오리모양토기를 무덤 안에 넣어두는 풍습도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지네요.

 

참고문헌

이장웅, 한국 고대 새(鳥類) 관념의 변화, 한국고대사탐구 31,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

홍보식, 신라ㆍ가야지역 象形土器의 변화와 의미, 한국상고사학보90, 한국상고사학회,  2015.

김중순, 한국문화원류의 해명을 위한 문화적 기호로서 ‘새’의 상징,  한국학논집56, 2014.

김영희, 호남지방 조형토기의 성격, 호남고고학보44, 호남고고학회 2013.

국립중앙박물관 오리모양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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