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개념정리/삼국시대와 가야

[한국사 개념정리]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 / 고구려편

데구르 도이 2025. 5. 7. 03:29

도이월드 한국사 개념정리 종교편 / 고구려 불교

 

안녕하세요. 도이월드 입니다.

오랜만에 개념정리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불교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공부를 해야하는 시점이 와 차근차근 내용들을 다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첫시간은 불교 수용 파트인데, 고구려의 내용부터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학생들을 위한 고구려 불교 Key word

  • 소수림왕 / 불교 수용 - 372년
  • 성문사와 이불란사에 순도와 아도가 머무름 - 374년

 

 

 

 


1. 고구려 불교 수용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에는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전하였습니다. 이어서 374년에 승 아도(阿道)가 들어왔으며 이듬해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지어 순도와 아도를 머물게 하면서 공식적으로 불교가 공인되었습니다.

 

사료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들이 보이네요.

소수림왕 2년(372) 여름 6월에 진(秦)의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浮屠]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經文)을 주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사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2년(372)

 

5년(375) 봄 2월에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머무르게 하였다.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阿道)를 머무르게 하였다. 이것이 해동 불교[佛法]의 시작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5년(375)

 

왜 고구려는 불교를 수용하였을까요?

보통 역사를 배울 때 삼국의 불교 수용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 수용했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업(業)과 윤회와 같은 내용을 기반으로 일종의 고등 종교로서 사상적인 통합과 동시에 신분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활용되었던 것에 큰 의미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어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었는지는 잘 배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삼국시대 초기 중국에서 수용된 불상 / 뚝섬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미지 출처 : 이뮤지엄)

 


2. 고구려에 수용된 불교 사상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전파되게 됩니다. 이때 중국에서는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중국 내 존재했던 노장사상을 토대로 이해합니다. 이것을 흔히 격의불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격의 불교 뜻 참고

 

고구려에서 불교가 공인되기 전 초전 불교 역시 중국을 통해 수용되면서 중국 격의불교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4세기 후반 공인이 되기 이전 부터 고구려의 법사가 중국 승려 지법사 도림과 서신을 주고 받았던 기록에서 그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도림은 당시 중국 동진때의 학승 격의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도림은 도교를 바탕으로 불교의 공(空)을 이해하며 강론하였는데 이때 도교의 '무위(無爲)'의 개념을 활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국 격의불교가 고구려에 수용되어 공인될 때까지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아서 아쉬움을 남깁니다. 때문에 소수림왕에 대에 공인된 불교가 초창기 수용된 불교와 같은 모습일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몇 기록들을 통해서 고구려가 사회 전반에 어떤 불교 사상을 활용하고 있었는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1)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불교는 순도!

소수림왕 2년 순도를 통해 불상과 경문을 받고 보답을 한 것과 392년 고국양왕이 교서를 내려 불교[佛法]를 숭상하여 믿고 복을 구하도록 하는 기록 등을 통해 고구려의 초창기 불교는 왕실을 주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불교에서 이상적 군주로 설한 전륜성왕설을 받아들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그 위엄이 사해에 떨쳤다.”고 하며 ‘호태성왕(好太聖王)’이라고 칭한 바 있습니다.

 

2) 계율을 강조한 불교는 담시!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를 참고해 보면 중국 관중 출신의 담시가 전한 불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담시는 삼승법(三乘法)으로 교화하였으며, 특히 귀계법(歸戒法)을 세워 삼귀오계(三歸五戒)를 지니게 하였던 내용이 있어, 소승적인 계율을 중요하게 여겼던 불교 사상이 함께 고구려에 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3. 전통 종교를 대체하는 고구려의 불교

 

신라의 사례에서는 이차돈의 순교와 같이 불교와 전통종교 사이의 큰 충돌이 있었을 것 같지만 고구려에서는 크게 그런 내용이 확인되지 않으며, 전통 종교를 대체해 나갔던 것 같습니다.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고려 요동성(遼東城) 옆의 탑은 옛 노인들이 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에 고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여 행차했을 때 이 성에 이르러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은 것을 보고 구름 안을 와서 찾아보니 어떤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는데 다가가면 곧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났다.
옆에 세 겹의 토탑(土塔)이 있었는데 위가 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으나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가서 승려를 찾으니 오직 잡초만 있었고 땅을 1장(丈) 정도 파 보았더니 지팡이와 신을 얻었고 또 파보니 명(銘)을 얻었는데 위에 범서(梵書)가 쓰여 있었다.

시신(侍臣)이 그것을 알아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불탑(佛塔)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자세히 물으니 답하기를 ‘한(漢)나라 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본래 휴도왕(休屠王)이라 쓰여 있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 부처를 가리킴)이다.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신심(信心)이 생겨 7중 목탑(七重木塔)을 세웠는데 후에 불교가 비로소 들어와 그 시작과 끝을 다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높이를 줄였는데 본래의 탑은 썩어서 무너졌다. 아육왕 이 염부제주(閻浮提洲)를 통일하고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

삼국유사, 제4 탑상, 고구려 성왕이 탑을 세우다

 

이 기록에서 등장하는 성왕은 누군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전륜성왕을 자처했던 고구려의 불교 모습을 기록으로 옮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3층 흙탑과 솥이 등장하는데, 전통종교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

 

위 링크의 대무신왕 시기에 있었던 이야기에서 당시 고구려에 있었던 신앙의 모습 유추할 수 있어 참조되기도 합니다.

 

 


 

음! 이렇게 고구려의 초창기 불교 수용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불교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어렵습니다 ㅠ

 

다음에는 사상의 전개와 함께 불교 수용과 확산에 영향을 준 역사적 사건을 함께 다루어보겠습니다.

 

 

참고문헌

정병삼, 한국불교사, 2025, 푸른역사

김두진, 고구려 初傳佛敎의 공인과 그 의미, 한국학논총36,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1

국사편찬위원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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